늙음의 참 뜻 - 현석호(한국M.B.W.전국 위원장)
(사목)지 편집자로부터「늙음과 나」라는 주제로 수상(隨想)을 써달라고 부탁을 받았을 때 순간적으로 나는'나를 늙은 사람으로 취급했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사실 나는 내 자신을 늙은이로 의식하지 못하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1907년 5월생 이니까 한국식으로 세어서 71세이다. 요사이의 신식으로 따진다면 69세밖에 안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구태여 그렇게 해서 나이를 줄이려고 할 생각은 없다. 우리의 습관대로 일흔 한 살이라고 묻는 사람에게 대답해준다. 그렇다고 해서 나이 많음을 돋보이게 할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이에 집착하거나 의식할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노인문제는 확실히 하나의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른바 노인의 소외현상이다. 사회적으로는 직업전선에서 빨리 후퇴 당하여 할 일이 없게 되고 가정적으로는 소위 핵가족의 형성으로 자녀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고독한 생애를 보낼 수 밖에 없는 실태를 말하는 것이다. 과거 우리나라의 전통적 효도사상에서는 자녀가 노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미덕이요 또한 의무로 삼아왔기 때문에 가정 안에서의 이러한 노인 소외문제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상은 해방후 서구의 개인주의사상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종래 한국 고유의 미덕이 자취를 감추게 되는 풍조에서 오는 불가피한 결과이다. 또 하나는 시대의 급변에 따라 세대간의 차이가 극대화되는 현상에서 오는 사회적 소외현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노인문제는 구미 사회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의 문제이지만 우리 한국에서는 갑자기 밀어닥친 문제로서 상당한 충격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선진사회의 것이면 모든 것이 다 좋은 것으로 착각하는 신판 사대주의 사상의 결과의 일단이라고 볼 수 있다. 문화의 사상과 조건이 다른 곳에서 외래 문화의식을 무조건 移植(이식)하는 것은 실로 예측할 수 없는 비극을 초래하고 마는 것이다. 최근 사회 각계에서 이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시하고 있는 것은 비록 때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하나의 문제점으로 등장되었다는 것으로 주목할 만한 일이다. 지금 나는 여기서 그 문제에 대하여 더 이상 언급할 능력도 없고 또 그럴 만한 처지에 있지도 않기 때문에 오직 나 개인으로서의 의견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볼까 한다. 사람이 '늙었다' 젊었다 함은 보통으로는 년명을 가지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 표준도 사실은 애매하다. 초로니 老壯(노장)이니, 원노니, 융노(隆老)니 하는 따위의 표현이 있기는 하나 그 관계는 역시 모호하다. 더우기 몇 십년 전의 표준과 오늘날의 표준이 또한 다르다. 예컨대 옛날에는 50세가 넘으면 완전히 노인행세를 하였지만 지금은 60이 넘어도 노인으로 치지 않고 70이 넘어야만 비로소 노인 대접을 받게끔 된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늙고 젊음의 표준을 연령의 차이에만 두지 않고 정신적 차원에 두는 견해도 있다. 즉 나이는 많아도 정신적으로 젊은, 젊은 노인이 있는가 하면, 나이는 젊지만 정신적으로 늙은, 늙은 청년이 있다는 것이다. 세월이 가면 사람은 나이를 먹기 마련이나 연령적으로는 늙는 것이고, 또 늙음에 따라 육체적으로 쇠퇴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나이에 불문하고 계속 성장해 가는 사람과 어느 시기에 가면 거기서 성장을 멈추는 사람이 있다. 계속 성장 않고 성숙하는 사람은 영원한 청년으로 볼 수 있고 그렇지 않고 어느 단계에서 정체하는 사람은 미리 죽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에 관련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느 사람의 묘비에 "이 사람은 25세에 죽고 75세에 묻혔다"라고 쓰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75세까지 살기는 했지만 이미 25세 때에 정신적으로 다 성장했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 이상 더 성장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비꼬아서 표현한 것이다. 사실 25세 경에 대학을 마친 사람이 직업전선에 나서면서부터 그날 그날의 직무에만 기계적으로 쫓기어 살 뿐 자기의 사상이나 의식이나 인생관을 성장시키고 계발하는 노력을 정지한 상태로 있다면 이 삶은 벌써 다 되어버린 사람으로서 정신적으로는 이미 죽은 노인이나 마찬가지이다. 그와는 반대로 자기의 윤리관과 철학관을 확립하고 인격의 성숙을 도모하여 일신반일신하는 생활을 계속하는 사람은 연륜의 가산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신적으로 항상 젊음을 간직하고 희망에 사는 청년이나 다를 바 없다. 나는 여기서 또 다른 측면의 늙음에 대한 생각을 해보고자 한다. 즉 늙음은 자기 마음에 달렸다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가 늙음을 의식하면 할 수록 더욱 늙어지고 허탈해진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자기의 연령에 너무 구애받지 않고 만사에 전신적으로 사고할 때에는 젊음이 솟구친다는 것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옛 말이 있다. 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알라는 뜻인데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온고 보다는 지신에 주력하는 것이 젊게 사는 비결이 되는 것을 실감한다. 왜냐하면 늙은 사람은 옛 것을 새삼 익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노인들은 밤낮으로 옛 일만을 추억하는 것으로 소일하는 버릇이 있다. 옛날 것은 항시 좋았고 지금 것은 모두가 나쁜 것만 같은 생각으로 고착하려고 하기 쉽다. 그것보다는 노인일수록 지신(知新)하는 데 노력을 더할 때에 새로운 의욕을 갖게 되고 미래지향적 생활태도를 다시 찾게된다. 따라서 늙어지면 사물에 대한 사고방식이 대체로 부정적으로 흐르기 쉬운 것인데 이것을 긍정적 방향으로 돌릴 때에 마음은 활기를 얻게 되며 청춘의 기분을 맛볼 수 도 있다. 또 노인이 모든 면에 소극적이 되는 것은 불가피한 생리적 현상이겠으나 이로 인해서 폐쇄적이고 완고하고 집착적이고 고루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에 정반대 방향으로 마음을 돌이켜 개방적이고 초월적인 자세를 취한다면 자신이 늙음에서 해방되고 젊음으로 복고하는 느낌을 찾을 수 있다. 내가 나의 늙음을 자인하면서 그 늙음을 어느 정도 감상하고 향유하는 비책( ? ) 하나를 털어놓는다면 이런 것들이 있다. 그 하나는 무엇보다도 신체적 건강을 보전하는데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다. 근년 들어 10여년간 나는 보건책으로 매일 아침 등산 산책을 계속하고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두 시간 정도의 등산과 운동을 하고 나면 신체적 노쇠를 방지하고 심신이 다같이 쾌적감을 갖게 되어 청년기의 스태미너를 회복하는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새로운 것을 공부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고 새 시대의 사조에 민감하려고 마음을 쓰는 일이다. 그리고 한 가지 일에 집중적으로 정력을 경주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더욱 좋다는 것을 체험하고 있다. 정신은 쓰면 쓸수록 소모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성장된다는 것이 만고의 진리임을 알게 된다. 체력도 마찬가지 이다. 노인이라 해서 몸조심을 너무하면 할수록 몸은 쇠퇴일노를 걸을 뿐이고 단련하면 할 수록 초인력을 되찾게 되는 것도 사실인 것 같다. 가령 독서나 강연 같은 경우에도 장시간 책을 읽어도 피로를 모르고, 몇 시간의 강연을 계속해도 견딜 만한 것을 보면 이것은 오직 매일매일의 심신을 단련하고 정진하는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다. 다음은 나의 늙음에 대한 다른 사람의 반응에 대해서 초연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한가지 간단한 예를 든다면, 나는 매일 몇 번씩은 버스를 타게 되는데 그때마다 당하는 일이다. 빈 좌석이 있을 때는 별문제가 아니나 좌석이 없을 때에 두 가지의 경우가 생긴다. 즉 다른 사람( 특히 젊은 사람 )이 자리를 양보해 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이다. 그러나 나는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작정하고 있으니 마음이 편하다. 즉, 자리 양보를 받을 때에는 나를 노인으로 알아주는 그 삶의 경로심에 감사하고 또 그렇지 않을 때에는 상대방이 나를 아직 늙은이로 보아주지 않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렇게 되면 상대방의 나에 대한 어떠한 반응에도 모두 다 감사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나의 늙음에 대한 의식을 자연히 덜하게 되어 소외감 같은 선입관을 배제할 수 있게 된다. 끝으로 내가 나의 노년을 사는 방법의 하나는 '오늘을 사는' 데 가장 역점을 두는 일이다. 과거로 되돌아가 이것저것을 추억하는 것을 않기로 다짐하고 미래가 많이 남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미래를 향한 오늘에 사는 것을 생활철학으로 삼는다. 성서의 "내일 걱정을 하지 마시오.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기시오." 라는 말씀을 글자 그대로 살겠다는 정도로 오늘에 전력을 다하기로 한다. 체력이나 정력을 내일을 위해서 아끼지 않고 하느님이 주시는 오늘을 감사하게 받아 오늘에 최선을 다하고 내일의 일은 오직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기로 한다. 그리하여 늙음을 잊고 젊음을 되찾는 기쁨 속에서 그날 그날을 만족하게 여기는 것을 나의 삶의 신조로 삼고자 한다.
'교육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Forum에관하여 (0) | 2012.12.03 |
---|---|
노인과노인심리 (0) | 2012.12.03 |
늙음에대한소고-D도민케스 (0) | 2012.12.03 |
노인문제1 (0) | 2012.12.03 |
노인문제2- 한국1 (0) | 2012.1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