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에 대한 소고 - (D. 도민게스 : 스페인 나바라 대학 교수)
Ⅰ. 序論
늙음이란 단순히 신체적 또는 생물적 관점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의사인 저자가 지적하듯 '늙는다'는 것은 삶에 대한 마음의 태도 선택이다. 오늘 흔히 보는 노년기에 대한 사회적 거부는 죽음이라는 현실에 대한 거부의 징조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문제를 달리 보아야 한다고 말하다. 삶의 이 마지막 단계가 마음으로 젊은이의 참 젊음이 되고 샘솟는 희망이 되게 하자는 것이다.
Ⅱ. 늙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생명의 다양한 현상을 이해하기란 우리로서 무척 어려운 일이다. 생명의 현상들은 늘 유동적이고 본질적으로 시간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고정됨이 없이 지나가 버리며 되돌릴 수도 없다. 그에 비해 공간이라는 관념은 비교적 파악하기가 쉽다. 우리는 공간 안에 살면서도 공간과는 분별되어 있다. 공간은 우리의 한계를 지어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우리 스스로 바꿀 수도 있고 실제로 바꾸기도 하는 한계이다. 공간은 이처럼 우리 삶 밖에 있는 만큼 조금은 알아듣기가 쉬운 편이다. 우리는 공간 안에 있으면서도 그와는 따로 있는 셈이다. 하지만 시간은 우리 실존의 너무나 은밀한 부분이라서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내재한다고 할 수도 있다. 공간은 다만 우리의 위치를 정해주는데 비해 시간은 우리와 너무나 밀접히 얽혀 있어 도리어 그것을 생각하지 조다 어려워진다. 지나가는 무상한 현상을 이해하기란 고정된 현상을 파악하기보다 어려운 법이다. 우리는 누구나 노년이 무언지 알거나 또는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이는 젊고, 저이는 늙었다고 우리는 말한다. 하지만 그런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아듣기가 그리 쉽지 않고 묘사하기는 더욱 어렵다. 우선 노년의 신체적 사실부터 보자. 무엇이 신체적 노년을 이루는 것일까. 이에 대해 다소의 자료는 있으나 별로 많지는 않다. 25세와 85세 난 사람 사이에는 여러 가지 신체기관의 무게가 줄어가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지라의 무게는 53.5%, 콩팥은 36.4%, 골은 15.8%, 그리고 부신은 12.0%가 각각 줄어든다. 생명기관의 이런 경감은 그대신 다른, 덜 특수한 조직이 무거워짐으로써 평형을 찾고, 전반적 체질의 변화로 이끈다. 이런 일련의 현상은 세포수의 감소와 변행한다. 특히 비생식적 유형의 세포의 경우가 그렇다. 25세라는 나이에서부터 세포내의 액을 측량하면 신진대사 세포의 양은 한결같이 직선적으로 줄어간다. 이렇게 순전히 신체적 관점에서 본다면 노년기는 25세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어떠한 생리기능의 경우에는, 비록 다른 기능들을 겨우 발달하기 시작하고 있는 때지만,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늙기 시작한다고까지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시력은 출생 후 몇 개월 안되어서부터 약화하기 시작한다. 루끄레띠우스는 이런 것을 달관하였기에 "우리는 나면서부터 죽는다"(nascentes morimus)라고 했던 것이다. 사람이 약 스무 살이 되면 추상지능이 온전히 발달한다. 그렇다고 26세가 되면 벌써 늙은이가 다 됐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도 그런 생각은 하지조차 않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지능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늙어가는 과정이 이미 시작되었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예술이나 과학의 위대한 작품의 대부분이 20세를 훨씬 넘은 사람들, 경우에 따라서는 늙은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는 이들에 의해 창출되었지만, 위에 말한 엄연한 사실은 여전하다. 물론 예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랭보라든가 모짜르트 같은 몇몇 사람의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썼을 때 그는 70이 넘었었고, 괴테의 [파우스트]는 그가 80세 때 지었으며, 미켈란젤로가 베드로 대성전의 원개를 설계했을 때 그는 80을 넘은 노인이었고, 티치아노는 90이 넘어서 가장 독창적 걸작들을 그려냈다는 사실 등은 간과할 수 없는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고 보면 엄밀히 따져 시간적 요인도 생물적 요인도 그 자체만으로는 사람을 젊거나 늙게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또 삶의 여러 단계를 경제적 요인하고만 결부시켜 생각한다면 그것도 지나치게 단순한 사고방식인 것이다. 키에르케고오르가 말했듯이 "모든 것은 미래에 달려 있다. 그리고 미래는 죽음으로 이끈다." 그러나 사람이란 아무 때고 죽을 수 있기 때문에 늙음을 오직 죽음과 관련시켜 규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처럼 신체적 특징이나 단순한 시간의 흐름만으로는 어떤 사람을 늙은이 또는 젊은이로 분류할 수가 없는 이상, 문제를 한층 더 깊이 들여다 보아야 하겠다. 그렇다면 늙음을 심리적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얼핏 보기에는 일종의 부정적 정의를 내리기는 쉽게 생각될지도 모른다. '늙음=젊지않음'식으로, 젊음에는 반발이 있는 데 비해 늙음에는 영합이 따른다는 식의 생각 따위도 그렇다. 일이 그처럼 단순치는 않은 것이다. 우선 그런 식의 정의는 중년이 더 적합한지도 무른다. 뿐더러 젊음의 이러한 이론적 특징들은 어떤 나이의 사람에게도 있을 수 있으며,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는 없는 수도 많다.
Ⅲ. 젊다는 것은 곧 이해할 줄 아는 것
하이데거가 인간의 정의로 내린 "하나의 지나간 미래"라는 말은 적어도 올바른 묘사라 하겠다. 늙은이에게는 인간적으로 말해서 미래가 없다.
하이이데거가 인간의 정의로 내린 "하나의 지나간 미래"라는 말은 적어도 올바른 묘사라 하겠다. 늙은이에게는 인간적으로 말해서 미래가 없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젊은이에게는 미래가 그의 전부이다. 아무려면 젊은이의 과거는 말할 수조차 없다. 존재하기 시작함이 바로 그들의 과거를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 일정한 세대에 속한다. 그리고 우리 사고방식이 우리 사회환경의 영향을 받듯이 우리 관점도 우리 또래의 그것을 따른다. 우리 또래란 우리보다 여덟 살이나 열살 위아래 사람들로서 우리를 둘러싸는 이들이다. 우리 자녀들은 이런 테두리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세대격차의 근원이고, 이 격차가 과거에는 덜 두드러졌을지 모르나 언제나 있기는 있었다. 오늘에 와서 세대격차가 크나큰 문제로 대두됐다는 것은 어쩌면 현대사회에서는 노인들이 과거처럼 존경을 받지 못하는 반면 젊은이들은 다만 늙지 않았다는 이유로 찬양을 받는 데서 오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어쩌면 심미적 이유까지 보태지는지도 모른다. 늙음은 추함, 주름살, 부연 눈동자 등을 연상케 하는가 하면 늙은이들은 신체적 박력과 심지어 정신적 예민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나라의 경우 권위의 위치에 눌러 앉아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뒤이어 오는 세대의 젊은이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나이는 비록 젊었을지라도, 이미 늙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누구를 이해한다고 해서 언제나 그의 견해를 받아들이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왜 우리와 달리 또는 우리와 반대되는 식으로 그가 생각하거나 행동하며, 그의 의견이나 처신이 우리에게 못마땅해 보이는 까닭이 어디까지 우리 자신의 탓인가를 이해하려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해는 관용의 입증이다. "참 사랑은 주는 데보다 이해하는 데 있다"고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는 점점 더 고립되기 쉽고, 그 결과 젊은이들의 행동이 때로는 언짢다 못해 악하게 보이기에 이른다. 우리가 젊었을 때, 하던 것과는 다른 것을 한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렇게 느끼게 된다. 하여, 외양을 가지고 객관적으로 패륜된 현실과 혼돈하고 마침내는 젊은이들이 하는 일이면 무엇이든 덮어 놓고 단죄하기에 이른다.
Ⅳ. 고독은 노인들을 망친다.
과반수 이상이 우울증에 빠지고 때로는 자살에까지 이른다. 나이 90이 넘어도 노쇠현상 자체가 사인이 되는 것은 아니나, 역시 걷잡을 수 없는 신체적 쇠퇴를 가져오고, 노인이 고적할수록 일찍 노쇠하기 시작한다. 몇해 전 영국의 어느 양로원에서 일어난 일을 상기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간호원들은 그곳 노인들의 안경, 보청기, 의치 등을 빼앗음으로써 완전한 신체적 좌절을 촉발하고 죽음을 재촉했다. 그런 끔찍한 일은 말고라도, 본격적 노망이란 고령자의 10%에게서 밖에는 볼 수 없는 현상이다. 어떤 의미론 은퇴하는 날부터를 노년기로 치기 시작할 수도 있다. 특히 자신의 직장이나 직업에 전념한 나머지 여타의 취미를 가꿀 겨를을 가져 보지 못한 이들의 경우 은퇴가 얼마나 심한 충격을 줄 수 있는지 우리는 잘 안다. 그럴 경우 인색이 노인의 압도적 집념이 되는 수가 있다. 아울러 남에게 되외시 당하는 아픔이 울분을 낳는다. 울분이란 혁명가의 주동력의 하나이기도 하다. 신체적 힘만 자란다면 늙은이들이 흔히 실체로 활약하는 혁명가가 되기도 한다. 사회가 이를테면 그들을 내친 만큼 그 사회를 파괴하려는 것이다. 프랑스 소설가 뽈.부르제는 혁명 당시 빠리의 방책을 지키며 싸우던 사람들은 젊은이들이거나 아니면 늙은이들이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사회에서 힘과 영향력을 누리던 중년의 사나이들은 거기 없었다. 일반사회는 무심코 늙은이들을 죽을 사람들로 여긴다. 마치 생애의 그 단계에 이르러서야 죽을 수 있는 줄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죽음의 거부가 여기 늙음의 거부와 하나가 된 것이다. 그래서들 사교생활에서도 늙은이를 빼놓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죽음에 대한 끔찍한 생각이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싸르트르는 늙은이들의 태도를 "지옥은 남들이다"라는 유명한 말에서 우연히 표현해 주었다. 지옥은 사랑과 희망의 결여이다. 인간적 희망을 배제한다는 것은 사랑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이다. 모든 꿈은 누군가를 향한 사랑 아니면 적어도 무엇인가를 향한 사랑의 씨앗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무엇인가가 학문이든 돈이든 권력이든 간에 어떤 실재로서 감지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늙은이의 처지란 관연 어떤 것인가. 미래, 갈수록 짧아가는 미래를 향하고 있기는 하나 현재의 순간을, 산다는 행위만을, 임박한 종말의 위협을 받는 지금만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바로 이 '임박한 죽음의 감각'에 있어 늙은이가 젊은이보다도 더 참되이 인가다와 보인다. 이 점에 있어 젊은이는 아무런 기한의 감각이 없는 것이 마치 동물과도 같다. 빠스깔이 말했듯이 실제로 위험에 처해 있지 않으면서 죽음을 두린다는 것은 참으로 두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죽음에 도전하는 것이다.
Ⅴ. 안락사도 생각하기 나름
머지 않아 올지도 모르는 사회에서 늙은이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몇해 전 다소 해학적인 글을 낼까 한 적이 있었다. 해학 치고는 어둔 편이었지만 아무튼 "책임있는 어버이됨"(역주 : 산아제한의 표어인 "responsible parenthood")을 내가 짓궂게 "책임있는 효도"라 이름 지은 것과 비겨 볼 셈이었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낳지 않을 자유가 있고 이미 잉태되었어도 원치 않는 아이의 생명은 말살해도 좋다면, 생존하는 자녀들이나 국가라고 짐이 되기 시작한 어버이들을 없애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요즘 불치 환자에게 권유하고들 있는 안락사야말로 노년의 잦은 병폐 내지 늙음 그 자체를 '고치는' 효성어린 해결책이 아니겠는가. 일가친척들도 많은 불편을 면할 것이다. 세상은 젊은이들만의 것이 되겠고, 마흔 대여섯 살 난 중늙은이 실직자의 문제도 간편하게 해결될 것이다. 아마 이런 '시대의 표징'에 공명하면서 그런 절차를 정당화하고 나설 신학자들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종전에는 유행이라고 불리던 것이 요즘은 '시대의 표징'으로 행세하는 모양이다. 인간이 무엇이냐는 정의 몇 가지만 분석하면 될 법한 일이다. 극심한 노망의 경우 아무리 민감한 양심도 쉽게 달랠 수 있다. 인간은 지능적 동물이거늘 지능을 잃고 식물이나 다름없이 그저 살아만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인간이기를 그쳤으며 영적으로 죽어 있다. 그를 없앤다는 것은 개를 잡는 것보다 조금도 죄스러울 리가 없다. 아직도 지능을 지니고 있는 늙은이들의 경우에는 또 다른 정의를 적용할 수 있다. "인간이란 남들을 위해 사는 존재다.", "인간은 공동체에 봉사하기 위해 산다." 자신의 가족이나 공동체에 보탬이 되기는커녕, 늙은이들은 정신이 아직 멀쩡한 이들마저도, 장애가 되어 있다. 남들에게 짐일 뿐이다. 그런데 그들의 신체기관들은 엄밀한 의미의 인간구실을 능률적으로 다할 수 있는 젊은이들의 생명을 구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어떤 윤리학자들은 아닌게 아니라 방금 은퇴한 노인이라도 진정한 의미의 인간인지 물의 여기가 있다고 하기까지 한다. "의심스런 일에 있어서는 자유"(In dubiis libertas)를 이라는 격언이 있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자녀들이 알아서 전문의를 불러 아무 진통 없이 늙은 어버이를 고이 처치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 아니겠는가. 이렇듯 의료에 종사하는 이들을 헐리욷 풍의 '고용 살인자'로 보려는 모종의 경향도 알아들을 만하다. 물론 그런 불쾌한 표현은 쓰이지 않을 것이고, '안락사 전문가'에게 연락한다고 할 것이다. 오늘날처럼 인간 생명이 경시당하고 있음을 통감하는 우리로서는 -인도받은 살인범 말고라도 - 급격히 늘어나는 납치사건들, 서로 싸우는 편들과는 상관도 없는 무고한 사람들의 살해 등을 볼 때, '책임있는 효도'가 어쩌면 머지 않아 현실이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쉽사리 뿌리칠 수가 없다. 더욱이 그것이 경제적 또는 사회적 이권에 편승할 경우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Ⅵ. 젊어서도 늙음을 면하려면
늙음에도 무슨 처방이 있을까. 앞서 본대로 늙었다는 느낌은 은퇴기를 지난 이들이 일반 사회생활과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일반사회의 태도에서 연유한다. 따라서 사회가 이 피해를 기워갚기 위해 무언가 해야 함은 마땅하고 옳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많은 나라에서는 여러 사적 공적 기구들이, 노인들이 바뀐 생활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우려 한다. 경로회, 요양원, 노인 클럽 따위가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사업이 노인들의 물적 경제적 생활환경을 향상시켜 주기는 하나 사회의 다른 성원으로부터 그들을 더욱 더 격리시키기도 한다. 가족과 분리시켜 폐쇄된 존재로 이끌어 넣어, 자신처럼 밀려난 다른 노인들, 그렇다고 종전의 정상적 생활에서 오래 사귀던 친구도 아닌 노인들하고 밖에는 접촉할 수 없게 해 놓는다. 그런 이들끼리 공통된 추억이나 지난 날의 체험을 나눌 수는 없다. 그래서 계속 외롭고 서로 냉담하다. 늙어서 새 우정을 맺는다는 것은 수월한 일이 아니다. 뿐더러 적응하기에 어려운 낮선 환경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래서 이런 시설들이 실패하고 있음을 본다. 그런 데에 자원해서 들어가는 노인들의 수가 매우 적은 것으로 미루어도 알 수 있다. 은퇴한 이들에게 삶이 쓸데있고 뜻있다는 느낌을 안겨 주는 한층 성공적인 방법도 있다. 뉴욕 대학이라든가 클리블란드의 웨스턴 리서브 그리고 프랑스의 뚤루스 대학 같은 곳에서는 이미 은퇴한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학위과정을 설정하고 있다. 이런 시도를 추진해온 이들의 의도는 노인들로 하여금 과학의 최근 문제들에 관심을 쏟게 함으로써 그들의 지성적 호기심을 계속 살리려는 데에 있다. 노화 현상 학자의 현재 견해로는 활동하던 생활에서 은퇴의 전적 수동상태로 옮기면서 유발되는 폐단은 주로 심리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뚜루스의 경우 일반 학생이 학교 시설을 쓰지 않는 5월과 9월에 노인을 위한 집중강의가 열린다. 이런 강좌들은 평소에도 자신이 일찍이 받은 교육과정과는 성격을 달리하고, 어떤 의미론 자신의 세대가 변혁해 온 사회의 제반 정신문제를 계속 뒤지지 않고 따라온 사람에게는 물론 매우 유익하다. 그런 강좌에서 얻는 새로운 지식이 이런 노인들로 하여금 젊은 세대의 불안정성과 그들을 뒤흔들고 있는 시대사조를 더 잘 이해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젊은이들을 더 잘 알게 됨에 따라 그들에 대한 원망도 사그라지고 아울러 자신을 대치한 사람들에 대한 적잖은 증오감도 줄게 한다. 사람이란 자기가 모르거나 못 알아듣는 것을 미워하기 쉽기 때문이다. 독일인 안과의사 히르슈베르크는 마드리드 근교에 있는 에스꼬리알 궁에 소장된 중세 아랍인 의사들의 원고를 읽기 위해서 75세에 은퇴한 연후에 아랍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물론 라틴어와 희랍어에는 이미 능통했었다. 한참 후 그는 일곱 권으로 된 [안과의학 역사]를 발간했는데, 이 명저는 전문연구서로서 뿐 아니라 하나의 문화사 연구로서 베를린 역사학회의 인정까지 받았다. 그보다는 덜 뛰어난 예로도 76세에 스페인 문학 과정을 통과한 미국인 의사를 나는 알고 있다. 이 두 사람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늙었다고 할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사회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늙음에 대비하여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일정한 수준의 정신적 성숙도를 유지하려는 투지가 우리에게는 분명 필요하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중년기 동안 오직 우리 직업에만 전념하 나머지 현대인이 직면해야 할 많은 중요한 문제를 관심 밖에 두고 지내서는 안되겠다. 우리는 지식에는 정신의 문을, 그리고 이해에는 마음의 문을 열고 살아 나가야만 하겠다. 늙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젊도록 힘을 씀을 말한다. 노인들의 복지를 위해 제도화된 시도로는 문제의 핵심을 다루지도 못한다. 그런 기구들은 어떤 프랑스인 작가의 말대로 결국 거창한 소외양상에 지나지 않는다.
Ⅶ. 희망과 젊음
그러나 위에 말한 지성적 호기심, 더구나 거지 소요되는 기본교육을 못받은 이들로서는 지닐 수 없는 이 호기심만으로는 마음으로 젊어 있기에 부족하다. 그보다는 다른 무엇이 또 필요하다. 고독으로 이끄는 이기심을 이겨내야 한다. 자신이 외롭지 않다고 스스로를 거듭 타이르고, 설사 귀와 눈이 어두워지고 몸이 마비되어 주변 사람들로부터 고립되더라도, 우리 삶이 결코 무용하지 않다고 다짐해야 한다. 모든 인간이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서로 통하고 있고 우리 고통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확신해야 한다. 노년기에 수반되는 신체적 정신적 고통, 일가와 친지들의 죽음으로 인한 불가피한 서러움, 우리에게서 거의 모든 것을 받은 자들의 무심 내지 배신 등을 무릅쓰고도 낙관할 줄 안다면, 우리는 결코 늙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지에 도달하려면 시간적 고령에 이르기 훨씬 전부터 연습을 해야 할 것이다. 성공이나 쾌락을 찾는 충동 같은 인생이 여타 매혹이 사라진 다음에는 낙관과 명랑이 그 어느 때보다도 삶에 필요불가결해진다. 늙은 사람은 꿈에 매달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띠봉의 말대로 꿈이란 시간을 견디어 내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생각을 피이퍼는 훌륭하게 표현한 바 있다. "'자연적 희망'은 -초자연적 덕성과는 달리-'젊음의 생명력'과 더불어 부풀었다 가라앉았다 한다. 그러나 인생이 저물어감에 따라 희망의 샘도 말라든다, '아직은'이라던 것이 지나간 일이 되고, 노년기는 젊음의 '아직은'을 포기하면서 '더는'이라는 것의 추억에 잠기도 만다. 그러나 초자연적 희망의 경우는 이와 정반대이다. 여기 비치는 미래는 그 어떤 기나긴 보람된 생애도 그에 비하면 하찮아 보이게 한다. 하여, 초자연적 희망이 인간에게 주는 젊음은 자연적 젊음보다 훨씬 더 깊이 인간에게 작용한다." 이 희망은 신적 신앙의 귀결이다. 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누구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이 인간의 종국이 아니라는 믿음은 가장 미개한 원시인들에게도 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결정적 종말이 있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반발한다. 이 본능, 이 자연스런 욕망은 적어도 신의 존재에 대한 잠재적 믿음을 전제한다. 물론 무신론자들도 있다. 하지만 무신론은 생각될 수는 있어도 생활될 수는 없는 것이다.
Ⅷ. 인간-삶을 위해 있는 존재
인간은 그 종말이 죽음인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가장 깊은 본능과 느낌이 모든 관념 중에서도 가장 비관적인 이 관념에 반발한다. 만일 우리가 이 관념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를 틀림없이 절망의 문턱으로 이끌고 우리 내심을 깊은 비애와 침울에 잠기게 할 것이다. 아니면 부질없이 사람답지도 못하게 이성을 잃은 경솔에 빠뜨리거나, 환락 내지 순간적 행위로 이끌어, 아무런 향방도 없이 그 자체에 그치는 순간 순간의 연속에 살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이든 이로서 할 수 있는 노릇이 아니다. 우리가 죽음에 붙여졌다면, 인간이 참으로 '하나의 부질없는 정력'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필연적 귀결은 우리를 철저한 이기주의자로 만들고 나이로는 젊어도 늙게 하는 것이리라. 인간은 삶을 위해 창조되었다. 바뀔 수는 있어도 그칠 수는 없는 삶을 위해서이다. 죽음은 시간과 영원의 교차점에 지나지 않는다. 몸, 인간이 지녔던 모습은 두고 가지만, 죽음 이전에 있었던 것은 다른 양상으로 존속한다. 모리악이 말했듯이 "그는 계속 그 힘찬 사나이, 그 젊은이, 그 소년일 것이다. 그는 언제나 그 아이일 것이다." 그분이랴. 그의 육신은 궤멸하고 그의 시간적 미래는 완전히 끊기더라도 그는 끝없는 젊음으로 젊어져 무한한 현재에 들어가서 성 아우구스띠누스의 표현대로 하느님과 영생의 안식을 누릴 것이라고 보태고 싶다. 바로 이런 굳센 희망이 노쇠하고 쓸데없어 보이는 늙은이를 그토록 명랑하고 행복하고 마음으로 젊게 해주는 것이다. (장익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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