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자료

충실함-재속의불씨

비움의노래 2012. 12. 2. 14:33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
- 시작성가 : 복음성가 429장 1.4절
-시작기도 : 훔숭의 기도
- 기도지향 : 서품자들, 수도행활과 봉헌생왈을 하시는 분들,또한 그의 부모들
  주교님과 사제단의 일치
  개인적인 지향을 침묵가운데
- 성령성가 - 복음성가 185장 1.5절
- 독서  : 지속의 불씨 중에서 부분발췌 - 충실함에 대해서
- 응답성가  : 복음성가 510장
- 반성
- 기도서 169면 금요일의 기도 (사제직과 수도생활의 설정에 대해서)
- 대사제의 기도 - 기도서 90면
- 마지막 성가 : 324장 1.3. 4
 
독서 : 재속의불씨중에서
전승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어떤 사람이 압바 안토니에게 물었다. “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면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압바가 대답했다. “ 잘 듣게나, 어떤 사람이든지 늘 하느님을 눈앞에 모시고, 무엇을 하든지 성경이 증언하는 바에 따라 행하며, 어디서 살든지 그곳을 쉽게 떠나지 말게,  이 세가지 가르침을 지키면 구원받을 걸세.“

수도생활은 하느님을 찾고, 복음을 실천하며, 이 두 가지를 계속해서 추구하는 것이다. 수도생활은 오직 한마음으로 살아 있는 하느님나라를 추구하는 일에 마음을 모으고 정신을 집중하며 영혼을 안정시키는 것이다.이를 위해 요구되는 바가 충실함이다.이 충실이란 점에서 중요한 것은 과거에 무엇에 충실해야 했나? 가 아니라 현재 무엇에 충실해야 하는가? 이다.

  충실함은 우리가 항상 도달하고자 노력해 온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 언제나 우리 행동의 요인이 되어 온 이상으로부터 우리를 이끌어 내는데 필요한 변화를 무엇이든 이루는 데 있는 것이다.   충실함은 장소의 안정이 아니라 마음의 안정이다. 충실함은 평생을 영원히 나침반을 벗어나 살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별을 따라가야 할 곳이라면 어디든 간다. 충실함은 온전히 살아남기 위해 기꺼이 변화하고자 함을 의미한다. 

충실함은 상처를 입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과정을 한 번에 한 단계씩 겪으면서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라기보다 영원한 사춘기, 즉 인간발달을 압류당한 상태에투신하는 것으로 규정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복잡한 과정에 함축된 모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성장하는 것은 기뻐할 이유라기보다 근심하며 무시해할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확실히 그러한 것은 인간 본성과 인간의 선 양쪽 모두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겠다. 아니 다윗은 분노와 욕망으로 가득 찬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분노와 욕망을 넘어서 다윗을 부른 하느님께 충실하지 않았던가?

나약함과 소심함으로 말미암아 시련을 겪어야 했던 요나도 결국에는 그런 문제가 없었던 사람들보다 야훼께 더 충실하지 않았던가? 하느님께서 요나로 하여금 니네베사람들에게 가라고 명령하셨을 때 요나는 자신이 원치않은 일이었기에 타르시스로 가는 표를 먼저 구해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갔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 충격적일 만큼 불충해 보이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결국 요나는 바로 타르시스에서 자신의 삶을 통해 얻은 주요한 교훈인 하느님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교훈을 발견했다. 베드로는 자신의 안전과 신분을 지키고자 그리스도와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했기 때문에 더 충실하지 않았던가? 사실 베드로는 잠시 다른 길을 따르다가 비로소 자신이 따르기로 고백한 그리스도에 비해 스스로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발견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 안의 하느님이 커지는 과정에 충실한 것과 일종의 합법적인 ‘ 완전함’ 이나 ‘ 약속 ’의 성취는 동일하지 않다. 사람은 모두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고, 그러한 굴곡을 통해 결국은 각자가 지향하는 지점인 하느님의 마음과 우리 마음에 있는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된다.

  충실함이란 그 자에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온전한 마음과 확신에 찬 영혼으로, 보다 명료한 정신과 정직한 행위로 우리를 이끌어 마침내 가장 깊은 자기 속에서 어떠한 별이 진정으로우리를 인도해 주는지 알도록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다.

이는 놀라운 생각이다. 충실함은 이상을 성취하거나 유지하고자 할 때 우리가 어디에 있든 그곳으로부터 꼭 있어야 할 곳으로 우리를 부르는 확고한 이상으로인해 사는 내내 자유롭게 움직이는 능력이다. 충실함은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한가지 잘못에 절대 머물러 있지 않는 상태이다. 모세가 이집트인을 죽였을 때 ‘충실’ 한 것인가?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를 취했을 때 ‘충실’한 것인가? 충실함이 곧 완전함과 같은 뜻이라면 전혀 충실했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충실함이 어떠한 것도 당연시하지 않고, 투쟁이 끝날 때까지 애쓰며 끝까지 살아내는 것이라면 모세와 다윗은 분명 충실했다.  

충실함은 살면서 마주치는 모든 것, 무엇보다 우리 자신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궁극적인 가치를 질문하도록 요구한다.    충실함은 공주에 매달린 채 정지해 보이는 기교가 아니다. 충실함은 우리가 충실성을 시험할 대 우리로 하여금 생가하고 결정하며 앞으로 가능한 존재와 현재의 존재 그리고 궁극적을 원하는 존재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해 준다.

영적 생활은 선택의 순간에 성장을 멈추는 데 있지 않다. 충실함은 우리로 하여금 거듭 선택하게 함으로써 성장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살면서 이 길과 저 길을 함께 이어 가며, 혼란스럽고 유혹하는 듯 보이는 현재를 매개로 우리가 창조된 목적에 이르게 한다. 물론 가끔 실패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실패를 통해서 삶에 대해 정말 알아야 할 것을 배우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일들 사이에서 계속 충실하게 선택해 나감으로써 우리는 단순히 적당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더 나은 것에 항상 투신할 수 있게 되고, 충실함을 철저히 단련한다.

  충실함은 우리로 하여금 추구 자체에 진실하고 그 여정 내내 멈추지 않도록 요구한다. 시인 제임스 러셀 로웰은 삶에서 충실함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잘 이해했다. “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낮게 세우는 것이 잘못이다.” 충실함과 믿음이 생명의 힘과 만나는 지점은 바로 지금이다. 둘중 어느 하나를 거부하는 수도생활은 진정한 수도생활이 될 수 없다. 이곳에서 우리는 씨름하고 성장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늘 새로운 하느님의 이름으로 행해야 하고 행한다.
신비한 수도원 이야기 중에서의 비유
나는 온전히 하느님께만 자신을 바치려는 단 한가지 열망으로 수도원에 들어왔다. 어떤 노승이 물었다.
" 자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 하느님께 제 자신을 바치고자 합니다."
그 노승은 자상한 아버지 같기를 바라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고 오히려 내게 소리쳤다.
" 바로 지금 그렇게 하시게 !"  나는 깜짝 놀랐다. 노승이 다시 소리쳤다.
" 지금!"  그런 다음 몽둥이를 들고 나를 쫒아왔다.  나는 돌아서서 뛰었다.
노승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 지금, 지금이라고!"  소리치면서 계속 쫒아왔다.  그것이 몇년 전의 일이다.
그분은 여전히 내가 가는 곳마다 몽둥이를 휘두르며 항상 똑같이 소리친다.
 " 바로 지금!"